독일 생활

프랑크푸르트 Museum Judengasse를 다녀오다 (유덴가세, 유대인박물관)

일단뭐라도끄적여보자 2020. 5. 20. 00:53

프랑크푸르트 뮤지엄패스를 끊은 둘째 날, 유대인 박물관인 Museum Judengasse에 다녀왔다. 

 

Museum Judengasse 티켓과 팸플릿. 프랑크푸르트의 학생이라면 학생증과 함께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사실 처음부터 이 곳을 방문할 계획은 아니었다. 원래는 쉬른미술관(Shirn Kunsthalle Frankfurt)에서 프리다칼로(Frida Kahlo)전을 보고 싶었지만, 주말인데다가 코로나19로 인해 들어갈 수 있는 인원에 제한이 있어서인지 바로 입장할 수 없었다. 시간 상 다른 박물관을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선택지에 있었던 유대인 박물관인 Museum Judengasse에 가게 되었다. 

 

코로나19로 인해 Judengasse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마스크를 필수적으로 착용해야 했고,

들어오기 전에 비치된 손 소독제를 사용하도록 지시받았다. 

또한 방문객들의 접촉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는지 Audio guide의 경우 대부분 헤드셋이 제거되어 있었다. 

안 그래도 규모가 작은데, Audio guide도 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전체를 둘러보는데 소요된 시간은 한 시간이 채 안 되는 것 같다.

 

사실 이 박물관의 배경이나 역사에 대해 전혀 무지한 상태로 방문했었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공부삼아 Museum Judengasse에 대한 정보를 정리해서 적어보려고 한다. 

 

Museum Judengasse Battonnstrasse 47 60311 Frankfurt am Main Tel: + 49 (0) 69-212-70790

 

지도를 보면, 어두운 색으로 칠해진 곳, 즉 박물관 바로 왼편에 유대인 공동묘지(Old Jewish Cemetery)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지나가다 보니 공동묘지를 둘러싸고 있는 벽에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그 이름들 위에는 작은 돌멩이들이 올려져있었다.

또  장미꽃이 올려져 있기도 했는데, 참 아름답게 느껴졌다.

 

Jewish Cemetery를 둘러싸고 있는 벽에 새겨진 이름들과 한 송이 장미꽃.

Judengasse의 의미?

 

    Judengassa는 말 그대로 'Jew's Lane'이라는 뜻으로,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유대인들의 길' 정도가 되겠다. 실제로 박물관에 가 보면 알겠지만, 대체로 집이었던 곳들이 길고 좁은 형태로 되어 있어서 이런 이름이 붙은 게 아닌가 싶다.

영어로는 주로 'Jewish Ghetto', 'Ghetto'라고 하는데, 이는 유대인 거주지역을 의미하는 단어로 쓰인다. 이 말은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유대인들이 모여살던 곳을 가리키는 단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나중에 ghetto라는 개념은 유대인들을 특정지역에 몰아넣었던 나치에 의해서 다시 사용된다.)

 

Judengasse는 어떻게 생기게 된 걸까?

 

    1430년대부터 프랑크푸르트 시 의회는 이미 유대인 모두를 추방시키는 것에 대한 대안으로서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과 떨어져서 살 수 있도록 방법을 강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1460년, 프랑크푸르트 시 의회는 실제로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이 떨어져서 살 수 있도록 ghetto라고 하는 유대인 거주지역을 마련했다. 이에 따라 유대인들은 삶의 터전이었던 집과 유대교 회당(synagogue)을 버리고 이 곳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유대인들이 차별받아왔던 역사는 다른 게시글에서 다루려고 한다.)

 

    어찌 됐든 유대인들은 이러한 조치에 대해서 30년 동안 저항해왔지만 도시의 한 부분으로서 Judengasse가 형성되었고, 그 이외에도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의 접촉을 최소화하려는 조치들이 취해졌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과 구별하기 위해 옷에 노란색 고리를 달도록 강요받았고, 기독교인들 또한 유대인들의 연회나 결혼식 등의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또 유대인들은 목욕탕을 가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으며, 이전의 관행과 달리 이들은 집을 살 수도, 땅을 살 수도 없었다. 웃긴 건, 이러한 Judengasse를 조성하는 데 유대인들이 기금을 마련해야 했음에도, 이 구역은 시 의회의 소유로 남겨져있었다. 

유대인들을 식별할 수 있었던 노란색 링.

    처음에는 약 10가구 정도가 모여 살았던 이 곳은, 나중에 200가구 정도가 모여 살게 되면서 3000명 정도가 거주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당연히 Judengasse의 인구밀도는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Judengasse의 집들은 좁고 길쭉한 형태로 발전하게 된 듯하다. 아마 가장 작은 집이었던 'Rote Hase'는 폭이 겨우 1.5m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차별의 끝은 어디인가

 

18세기까지도, 유대인들은 Judengasse에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었으며, 사회문화적으로 차별을 받았고, 가질 수 있는 직업에도 제약이 있었다. 그렇다면 차별의 역사를 보여주는 Judengasse는 언제까지 지속됐을까? 1796년에 프랑스 군대의 프랑크푸르트 폭격으로 인해 Judengasse의 북쪽 부분이 파괴되는 사건이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것이 바로 1864년까지 이어진 기나긴 유대인 해방의 시작점이었다는 것이다. 1864년에야 드디어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들은 다른 시민들과 동등한 지위를 쟁취해낼 수 있었다.

 

프랑스 혁명기의 Mainz에 세워진 자유의 나무. 유대인들은 일시적으로나마 해방을 이뤘다.

이러한 완전한 해방이 오기까지의 과정이 참 다사다난하다. 나폴레옹이 독일 지역을 정복했을 때, 일시적으로 일정 구역 내에서 유대인들의 지위 향상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독일에서 나폴레옹이 철수한 이후, 재집권한 프랑크푸르트 시 의회는 1824년에 유대인들이 지위에 대한 새로운 법률을 도입했고 이에 따라 다시 유대인들은 평등한 권리를 박탈당했다. 이때 비록 봉인된 ghetto에서 살지 않아도 됐으며 기존의 상업 활동도 이전에 비해서 나아졌지만, 그들의 정치적 권리는 전혀 보장받지 못했다. 독일 국회에서 '독일 시민에 대한 기본법'을 발표했던 1848/9년에 다시 해방을 누릴 수 있었으나 또 다시 군주정이 집권하면서 그들은 다시 한 번 법적인, 정치적인 차별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864년까지 일련의 법률적 개선이 이뤄지면서 드디어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들은 완전한 법적 해방을 누릴 수 있었다. 물론 이 또한 나치의 시대가 오기 전까지만 지속되었지만 말이다. 

 

Museum Judengasse 홈페이지 화면. 독일어와 영어로 제공하고 있다. 

 

  위 내용들은 모두 Museum Judengasse에서 운영하는 홈페이지에서 참고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의 유대인들의 삶이나 당시 시대 배경과 같은 내용들이 잘 정리되어있다. (영어/독일어 제공)

http://www.judengasse.de/index.htm

 

Judengasse

 

www.judengasse.de

 

Museum Judengasse 내부의 모습.

유대인 차별의 역사가 담겨 있는 Museum Judengasse. 프랑크푸르트에는 미술관과 박물관들이 정말 많은데, 하나하나 그 역사를 살펴보면 참 흥미로운 것들이 많다. 나치에 의한 대량학살, 즉 홀로코스트로만 기억되던 유대인들의 역사가 실제로는 중세부터 이어진 기나긴 차별의 역사였다는 것을, 이 곳을 방문하기만 해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